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는 1853년 네덜란드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빈센트가 태어나기 전 그에게는 태어나지 못하고 죽은 형이 있었는데 그 형의 이름도 빈센트였습니다. 그는 항상 죽은 형을 대신해 본인이 살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 생각이 본인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는 죽은 사람을 대신해 살아가기에 항상 마음속에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고흐는 학창시절 상당한 독서광이었으며 프랑스어, 영어 등 외국어에도 뛰어난 두각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15세인 1868년 갑자기 학교를 자퇴하게 되는데, 많은 학자들은 고흐 집안의 병력인 정신병이 이 시기에 빈센트에게도 발병되지 않았을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16세인 1869년 부터 23세인 1876년 까지는 삼촌의 화랑에서 화상으로 근무하게 됩니다. 아들이 없었던 빈센트의 삼촌은 후에 빈센트나 테오에게 본인의 화랑을 물려줄 생각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직장에서 성공했고 벌이도 좋았습니다. 동생인 테오의 아내는 나중에 이때가 빈센트의 인생에서 가장 좋은 때였다고 말했습니다. 아마 이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면 우리가 아는 빈센트 반 고흐는 없겠지만 그의 삶은 안정적이지 않았을까요.
화랑에서 많은 미술품을 접한 빈센트는 특히 밀레의 작품에 감동을 받았으며, 노동자들의 삶을 경건하게 표현한 밀레의 영향으로 가난한 노동자들에 대해 종교적 사명감과 연민을 가지게 됩니다. 삼촌의 화랑이 사업을 확장하며 빈센트는 런던 지점에 파견되는데 이 곳에서 가난한 노동자들의 비참한 실상과 마주하게 되며, 비슷한 시기 하숙집 주인의 딸을 짝사랑해서 고백했지만 거절당해 상당한 정신적 대미지를 입습니다. 감언이설로 미술품을 판매하는 자신의 직업에 회의를 느낀 그는 일을 그만 둔 후 잠깐의 교사생활과 서점 점원을 거쳐 가난한 사람들에게 헌신하는 목사의 길을 걷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신학대학에 입학해야 하는데 빈센트는 입학시험에서 낙방하고 말았고 종교적인 일을 하고 싶었던 그는 시험이 필요 없는 선교사가 되어 1879년 벨기에의 보리나주라는 탄광 마을로 갑니다. 가난하고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에게 헌신을 다했지만 교구 사람들은 그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으며 6개월 뒤에 결국 선교사 자리에서도 해고당하고 맙니다.
사회에서 적응을 힘들어 하는 고흐에게 동생 테오는 그림을 그려보는 것은 어떻겠냐며 권유합니다. 이때부터 고흐는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자신이 좋아하는 옛 화가들의 그림을 모사하며 화가로의 길에 들어섭니다. 잠시 동안 외사촌인 화가 안톤 모베에게 그림을 배우기도 했지만 빈센트가 매춘부와 동거를 시작하며 모베는 절교를 선언합니다. 아들이 매춘부와 동거를 한다는 사실에 목사인 아버지는 충격을 받아 빈센트를 정신병원에 넣겠다고 노발대발합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매춘부와 결별 후 빈센트는 1883년 다시 부모님이 있는 뉘넨의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뉘넨에서 생활하며 계속 그림을 연습하던 그는 1885년 '감자 먹는 사람들(The Potato Eaters)'이라는 대작을 완성합니다.
야심 차게 그린 대작이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합니다. 설상가상으로 그림의 모델 중 한 명이었던 처녀가 임신을 하자 이웃들은 평소 이상한 행동을 자주 했던 빈센트를 의심합니다. 뉘넨의 신부가 마을 사람들에게 빈센트의 모델로 서지 말 것을 경고해
더 이상 뉘넨에서 모델을 구할 수 없던 그는 고향을 떠나 벨기에 앤트워프를 거쳐, 동생 테오가 있는 파리에 다다릅니다. 이름만 들었던 인상주의 작품들을 접하고, 당시 파리에서 한창 인기였던 일본의 우키요에에 빠져 우키요에를 수집하던 그는 밝고 선명한 색채 대비와 굵은 윤곽선 간결함 등으로 대표되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갑니다.
인물, 정물, 풍경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그리던 그는 자신의 자화상 또한 많이 그렸는데 그 이유는 모델을 기용할 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도시의 생활에 지쳐가고 테오와의 마찰이 종종 생기자 1888년 빈센트는 프랑스의 시골 마을 '아를'로 거처를 옮깁니다. 이 마을의 따듯한 기후와 밝은 색채에 반한 그는 1년 동안 이곳에서 300여 점의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혼자 생활하는 형이 걱정되었던 테오는 폴 고갱의 후원자가 되어 아를에서 빈센트와 함께 생활할 것을 부탁하였으며 이때부터 빈센트 반 고흐와 폴 고갱의 살벌한 동거가 시작됩니다. 달라도 너무 달랐던 두 사람의 동거는 결국 빈센트가 폴과의 싸움 중 자신의 귀를 자르며 끝나게 됩니다. 빈센트는 자신의 귀를 매춘부에게 주었으며 당시 자신이 귀를 자른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점점 심해지는 정신착란과 환각증세에 병원을 오가던 그는 결국 1889년 5월 생레미의 생폴 요양원으로 들어갑니다.
이곳에서도 1년 동안 약 100점의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시기에 그가 죽음을 깊이 생각했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 시기에 자주 그렸던 사이프레스 나무는 한번 자르면 다시는 뿌리가 나지 않아 죽음의 나무라고 여겨졌으며 영원을 상징하는 별은 은유적으로 죽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무렵 몇몇 전시회에 초청받고, 작품들이 호평을 받으며 사람들에게 이름이 알려져 갔지만 빈센트는 더욱더 우울의 늪에 빠지게 됩니다.
1950년 5월 요양원에서 퇴원한 그는 파리 교외의 오베르 쉬르 와즈로 거처를 옮겨갑니다.
위의 그림을 그린 시기에는 아무래도 마음을 완벽하게 굳힌 것 같습니다. 꽃은 시들어가고 어두운 청색 하늘을 불길한 까마귀가 날아오릅니다.
결국 빈센트 반 고흐는 1890년 7월 27일 자신의 가슴에 권총 방아쇠를 당깁니다. 심장을 빗나간 조준으로 즉사하지 않았지만 2일 뒤인 1890년 7월 29일 결국 숨을 거두게 됩니다.
그의 작품들은 그가 사망한 지 11년이 지난 1901년 파리의 전시회에 71점이 전시된 후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전문 미술 털이범들은 살아생전 너무 고생했던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은 존중의 의미로 훔쳐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고통 속에 본인을 욱여넣으며 그려간 작품들이 지금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알면 그는 하늘에서 조금은 기뻐할까요?
그의 작품 하나하나에 여전히 전 세계인들이 열광하고 감동하는 걸 보면
그의 그림은 아마 본인도 모르는 사이 삶을 온전히 바쳐 후대에 주고 싶었던 그의 선물인가 봅니다.
'Art > Soul of paint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차갑지만 새로운 시선 에드가 드가 (Edgar Degas) (0) | 2019.05.16 |
---|---|
황금으로 그린 여인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0) | 2019.05.15 |
벌거벗은 격렬한 욕망. 에곤쉴레 (Egon Schiele) (0) | 2019.05.09 |
원시적이고 이국적인 힘 폴 고갱(Paul Gauguin) (0) | 2019.05.05 |
우아하고 섬세한 감성 프레드릭 레이튼(Frederick Leighton ) (0) | 2019.05.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