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클림트는 1862년 7월 14일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바움가르텐에서 금속 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들 셋 딸 넷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친척의 도움으로 14세였던 1876년 빈 응용미술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형제인 에른스트 클림트와 게오름 클린트 역시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뛰어난 실력으로 당시 교사로 재직 중이던 페르디난트 라우프베르거, 한스 마카르트 같은 당대의 유명한 화가들의 주목을 받았으며, 그의 뒤를 이어 진학한 동생 에른스트 클림트, 역시 뛰어난 학생으로 인정받고 있던 프란츠 마츠와 함께 동인을 결성하여 예술적 이상을 교류하면서, 링 거리의 교회 창문 디자인, 체코슬로바키아의 칼스바트 온천장의 천장화, 라이헨헤브크 국립극장의 천장화 제작 같은 일들을 주문받아 학비를 조달하기도 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이미 어느 정도 화가로서의 명성도 얻게 되었습니다.

 

졸업 후에는 에른스트, 프란츠 마츠와 함께 '쿤스틀러 콩파니'라는 공방을 차려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주로 건축물의 벽면 장식 등을 했으며 이때까지는 전통적이고 사실적인 화풍으로 작업을 했습니다. 1890년에는 비엔나 구 국립극장의 벽화 작업으로  황제에게 특별격려상인 황금공로십자훈장을 받았고, 그들의 명성은 빈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the old burgtheater 1889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습니다. 1892년 그의 동생인 에른스트와 아버지가 뇌일혈로 사망하며 구스타프 클림트는 큰 실의에 빠집니다. 이 비극으로 인해 클림트는 3년 정도 화가로서의 공백기를 가지게 됩니다. 3년 뒤인 1895년 그가 다시 붓을 잡게 되었을 때 그는 이미 예전의 클림트가 아니었습니다. 

19세기 말 영국, 프랑스 등지에서 시작된 신 미술운동을 접하게 된 그는, 여전히 보수적인 오스트리아의 미술 경향과 협회에 반발하며 요제프 호프만, 콜로만 모저 등 젊은 예술가들과 '빈 분리파'를 결성. 초대회장이 됩니다.

이 시기 교육부에서 의뢰받아 작업한 비엔나 대학교의 천장화 '철학', '의학', '법학'은 대중에게 외설적이란 비난을 받았으며, 결국 사례금을 돌려준 후 다시 회수하게 됩니다. 

이 세 점의 작품은 수집가들의 손을 거쳐, 훗날 나치의 침공으로 불타게 되었다고 합니다.

 

대중과 여론의 비난으로 클림트는 '빈 분리파'에서도 점점 지지를 잃게 되었으며, 1905년 '빈 분리파'를 떠나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홀로 선 그는 점점 더 관능적이고 화려한 자신만의 화풍을 발전시켜 나갑니다. 클림트의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키스', '다나에'가 이 시기에 탄생했습니다.

The Kiss 1907~1908

 

Danae 1907~1908

 

 

 

 

실제 금가루를 사용한 장식과 화려한 문양은 그 당시 오스트리아 상류층 여인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으며 많은 여인들이 클림트의 모델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클림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지만 '모델인 여성들과는 모두 잠자리를 했다.'는 소문이 무성한 빈의 카사노바였습니다. 그가 사망한 후 14명의 혼외자가 유산상속 소송을 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카사노바였던 클림트에게도 운명의 사랑이 있었는데,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동생 에른스트의 처제인 에밀리 플뢰게입니다. 생전 언론에 어떠한 인터뷰도 남기지 않았던 클림트지만 에밀리에게는 400여 통의 엽서를 보냈으며, 그의 생 마지막 순간에도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합니다.

 

Emilie Floege

클림트는 1918년 1월 18일 뇌졸증으로 쓰러져 투병하다 그해 2월 6일 스페인 독감에 걸려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56세였습니다.

 

그의 작품 속 여인들은 아름답고 빛나며 관능적입니다. 그림에는 보통 화가의 감정이 투영되는데, 클림트가 모델들을 바라봤던 시선에 모델들 또한 동화되었던 건 아닐까요.

평생 여인들을 사랑하며, 여인들의 사랑을 받으며 화폭에 담았던 클림트는 지금도 여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화가 중 한 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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