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4년 프랑스 파리의 전형적 부르주아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에드가 드가는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집안이 소유한 나폴리은행의 파리지점 지점장이였으며 40대가 될 때 까지는 그림을 팔아 돈을 벌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여유있는 생활을 했습니다. 당시 파리 최고의 고등학교인 리세 루이르그랑에 다니던 그는 박물관에 갔다가 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졸업할 때에는 루브르박물관의 작품을 카피할 수 있는 허가를 얻었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법대에 가기를 원했고 그 기대에 부흥하려 했던 에드가는 1853년 법대에 입학했으나 도무지 흥미를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법대를 그만 둔 그는 1855년 에꼴 데 보자르라는 미술학교에 입학해 당시 유명화가였던 앵그르의 제자인 루이 라모트에게 그림을 배우게 됩니다. 

1856년엔 이탈리아로 건너가 3년동안 머물며 르네상스시대 거장들의 그림을 모작했습니다. 10년 정도 그림공부에만 몰두한 그는 1865년 '오를레앙의 비극' 이란 작품을 살롱에 출품합니다. 초기의 그는 전설이나 역사적 내용을 주로 그렸지만 인상주의의 선구자라 불리는 에두아르 마네를 만나며 전환기를 맞게 됩니다. 본인이 살고있는 현재에 초점을 맞추기로 결심한 그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주로 그립니다. 

The Bellelli Family 1858~1867

1870년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이 발발하며 드가는 방위군에 입대하였으나 소총훈련 중 시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 드러납니다. 30대에 이미 시력에 문제가 있었던 그는 말년에는 시력을 거의 잃게 됩니다. 

전쟁이 끝난 후 1872년에는 어머니의 고향인 미국으로 건너가 1년 정도 여행했으며 이듬해인 1873년 프랑스로 귀국하기 위한 배편이 지연되자 다른 배를 기다리며 삼촌의 면화사무실을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습니다. 

A Cotton Office in New Orleans 1873

 

 

 

 

파리로 돌아온 그는 1874년 아버지의 사망, 동생이 사업을 하며 생긴 부채로 가세가 기울자 물려받은 집과 미술품등을 처분했고 생계를 위해 본인의 작품을 판매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모네와 르느와르, 피사로, 스슬리 등 젊은 예술가들과 의기 투합한 그는 독립적인 전시회를 열게 되었고, 순간의 인상에 집중하며 빛에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색감에 주목한 작품들에 한 비평가는 인상주의라는 이름을 붙여주게 되며 이들은 초기 인상파의 주역이 됩니다. 

드가는 7회의 인상주의 전시회에 출품했지만 정작 자신은 인상파라 불리는것을 싫어했습니다. 인상파 화가들이 주로 야외에서 작업하며 빠르게 그림을 완성했지만 드가는 실내에서 작업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철저한 계산에 의한 그림을 그리던 그는 인상파에서 나와 자신만의 독자적인 길을 갑니다.

그는 많은 발레리나 작품을 남겼는데 발레라는 예술 보다는 발레리나인 가난한 10대 노동자들의 삶에 초첨을 맞추게 됩니다. 파리 오페라하우스 부설인 발레 스쿨의 학생은 대부분 가난한 노동자 출신의 어린 10대 자녀들이였으며, 부유한 고객들은 공연이 끝난 후 어린 소녀들을 직접 만날 기회가 주어졌는데 이는 종종 매춘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드가는 주로 무대위의 화려함 보다는 연습실, 리허설, 공연이 끝난 후의 순간을 그려냈고, 모델들의 시선은 제각각 다른 곳을 향해 있습니다. 그녀들은 아름다운 옷을 입고있지만 표정이 드러나지 않아 어딘가 의뭉스럽고 한쪽으로 비껴가있는 그림의 구도는 어쩐지 불안합니다. 

The Ballet Class 1873~1876

 

Musicians in the Orchestra 1872
L' Absinthe

1880년대에는 발레리나나 경마 외에도 세탁점 점원 모자점 점원 등 패션의 도시 파리에서 눈에 띄지 않는 여성 노동자들도 그리게 됩니다. 

The Millinery Shop 1885

 

Women Ironing 1884~1886

파리 미술계의 거장 반열에 올라서게 된 그는 회화 뿐만 아닌 판화와 조각등에서도 많은 걸작을 완성했으며, 젊은 시절부터 서서히 떨어지던 시력이 1901년에는 거의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후 그는 조각에 몰두하였으며 1917년 9월17일 83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어딘가 차갑고 냉정한 그의 작품들처럼 그는 인간혐오증이 있었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 갔습니다. 어린시절 어머니의 부정을 목격했고 이 사건이 여성 혐오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반유대주의 성향을 보였으며 이로 인해 유대인 친구들을 모두 떠나보내기도 했습니다.

 

인간을 바라보는 그의 뒤틀린 시선이 독특한 시각으로 많은 걸작을 남긴걸 보면 그는 고독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이 아니라, 타인과의 거리감에 평안함을 얻던 개인주의자가 아니였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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