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고갱(Paul Gauguin,프랑스) 은 기자인 아버지와 페루계 어머니의의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1851년 나폴레옹의 집권으로 급진적성향의 폴 고갱의 아버지는 정치적 탄압을 피해 아내의 친척이 있는 페루로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페루로 가던 중 고갱의 아버지는 심장병으로 사망하고 맙니다. 남은 고갱과 고갱의 가족들은 페루의 리마에서 4년을 살게됩니다. 유년시절 페루에서의 경험은 고갱에게 큰 영향을 줍니다.
1854년 고갱과 그의 가족은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으며 1865년 고갱의 나이 17세에 도선사가 되어 6년 동안 배를 타고 세계 이곳 저곳을 누빕니다. 6년 뒤인 1871년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들은 고갱은 파리로 돌아왔으며 선원생활을 그만두고 어머니 친구의 소개로 주식 중개인이 됩니다. 새로운 직업이 나름 적성에 잘 맞았는지 이 때 고갱은 꽤 여유로운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1873년엔 덴마크 출신의 여인 메테 소피 가트와 결혼해 10년동안 5명의 아이들을 갖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그는 작가들의 그림을 수집하기도 하고, 직접 그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1876년에 처음으로 살롱에 출품했으며, 인상주의 창시자 중의 한명 카미유 피사로를 만나게 됩니다. 고갱은 카미유 피사로를 스승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고갱 초기의 작품은 여러가지 면에서 카미유 피사로의 작품과 닮아 있습니다.
위 작품은 폴 고갱의 초기작이며 아래 작품이 카미유 피사로의 작품입니다.
표현방식에서의 유사함이 느껴지시나요?
1882년 프랑스 주식시장이 붕괘하며 폴고갱의 직업은 불안정해 집니다. 1883년 고갱은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화가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벌이가 어려워지면서 부인과의 관계도 소원해졌고 (방탕했던 폴 고갱의 행실도 두사람의 관계에 큰 몫을 했다고 함) 혼자 파리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고독한 파리생활에 지친 그는 1886년 브르타뉴의 퐁타방으로 이사합니다.
퐁타방은 1850년대부터 물가가 비싸고 번잡한 도시를 피해 한적한 곳을 찾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곳입니다. 젊은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고갱은 특이한 도자기를 만들어팔아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시기부터 고갱의 화풍은 점점 독창적으로 변화합니다.
생계가 어려웠던 그는 매형이 파나마에서 운하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퐁타방에서 만난 동료화가 샤를라발과 함께 파나마로 떠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그는 오래 머물지 못했고 프랑스로 돌아오는 도중 마르티니크라는 섬에 5개월 정도 머물며 이국적이고 원시적인 작품들을 그려냅니다.
프랑스로 다시 돌아온 고갱은 1888년 마르티니크에서 그린 작품들로 전시회를 하게 되는데 이작품들을 빈센트 반 고흐의 동생인 테오 반 고흐가 보고 크게 감동합니다. 고갱의 후원자가 되기로 한 테오는 달마다 150프랑을 지원 해 줄테니 한달에 한점씩 본인에게 그림을 넘기고, 또한 형인 빈센트 반 고흐와 함께 살 것을 제안합니다.
이렇게 해서 고갱과 고흐는 아를에 있는 그 유명한 노란 집에서 함께 생활하게 됩니다. 아웅다웅하면서도 두사람은 잘 지내는 듯 했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너무 달랐던 그들의 동거는 결국 두달만에 고흐가 본인의 귀를 자르며 끝나게 됩니다. 고갱이 잘랐다는 소문도 많지만 진실은 결국 고흐와 고갱 둘만 아는 이야기겠죠.
고흐를 열받게 했던 고갱의 작품 '해바라기를 그리는 화가' 입니다. 위에서 내려다 보는 듯한 시선은 고갱 본인이 고흐보다 우월하다는 표현이 아니였을까 합니다. 이 그림을 본 고흐는 화가 많이 났다고 합니다. 고흐가 즐겨그렸던 해바라기는 다 시들어 있으며, 그림속의 자신은 마치 미치광이 처럼 보인다는 이유였습니다.
1889년 열린 파리의 만국박람회에서 동남아시아와 일본, 태평양의 이국적인 풍경에 홀린 고갱은 없는 돈, 있는 돈을 탈탈 털어 타히티로 떠납니다. 2년 동안 타히티에서 본인만의 화풍을 발전시키며 그림그리기에 매진합니다.
타히티에서2년간의 작업 후 야심차게 프랑스로 다시 돌아온 그는, 타히티에서의 작업물로 개인전과 경매를 열지만 대중의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충격이 컸던 고갱은 1894년 코펜하겐에 살고있는 가족들에게 방문해 마지막 인사를 한 후 타히티로 돌아갑니다.
매독과 영양실조로 그의 몸은 이미 망가지고 있었으며, 파리에서의 처참한 실패로 인한 우울증까지 겹치며 고갱은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자살 기도 전 유언과도 같은 유작을 남기기로 결심한 그는 1897년 작품명마저 철학적인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를 그립니다.
자살시도에는 실패했지만 그의 몸은 점점 쇠약해졌으며 1903년 심장발작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폴 고갱의 삶을 소설로 풀어낸 작가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민음사, 옮긴이 송무) 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 나는 이런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날 곳이 아닌 데서 태어나기도 한다고. 그런 사람들은 비록 우연에 의해 엉뚱한 환경에 던져지긴 하였지만 늘 어딘지 모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산다. 태어난 곳에서도 마냥 낯선 곳에 온 사람처럼 살고, 어린 시절부터 늘 다녔던 나무 우거진 샛길도, 어린 시절 뛰어 놀았던 바글대는 길거리도 한갓 지나가는 장소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가족들 사이에서도 평생을 이방인처럼 살고, 살아오면서 유일하게 보아온 주변 풍경에도 늘 서먹서먹한 기분을 느끼며 지낼지 모른다. 낯선 곳에 있다는 느낌, 바로 그러한 느낌 때문에 그들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뭔가 영원한 것을 찾아 멀리 사방을 헤매는 것이 아닐까. 또는 격세유전(隔世遺傳)으로 내려온 어떤 뿌리깊은 본능이 이 방랑자를 자꾸 충동질하여 그네의 조상이 역사의 저 희미한 여명기에 떠났던 그 땅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는 것일까. 그러다가 그는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그들이 죄다 태어날 때부터 낯익었던 풍경과 사람들이었던 것처럼 정착하고 만다. 마침내 그는 이곳에서 휴식을 발견하는 것이다. "
아마도 고갱은 타히티에서 일생의 평안과 휴식을 찾아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Art > Soul of paint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황금으로 그린 여인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0) | 2019.05.15 |
---|---|
고통속에서 태어난 영원한 가치.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0) | 2019.05.10 |
벌거벗은 격렬한 욕망. 에곤쉴레 (Egon Schiele) (0) | 2019.05.09 |
우아하고 섬세한 감성 프레드릭 레이튼(Frederick Leighton ) (0) | 2019.05.04 |
꿈을 그린 화가 앙리루소 (Henri Rousseau) (0) | 2019.05.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