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은 전통적인 미술 형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추구하려는 움직임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난 때입니다.

1890년부터 약 20년간 유럽과 미국에서 유행한 아르누보 운동은 아름다운 미술품은 자연의 형태를 닮아야 한다는 존 러스킨의 주장에서 시작되었으며, 그의 제자인 윌리엄 모리스가 주도한 미술공예 운동으로 더욱 발전해나갔습니다. 순수미술 분야에서는 이미 인상파에 의해 혁신적인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아르누보 운동은 주로 공예, 포스터, 건축 등 응용미술분야에서 활발하게 발전해 나갑니다.

산업발전에 의한 대량화, 획일화에 반대하며 전통적인 수공예를 지향한 이 운동의 특징은, 선과 면을 강조, 자연을 모티브로 한 유기적인 곡선으로 아름다움을 극대화함에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작가는 아르누보의 대표화가 중 한 명인 ‘알폰스 무하’입니다.

오스트리아가 체코를 지배하던 1860년, 체코의 작은 마을에서 알폰스 마리아 무하는 태어났습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어머니의 뜻에 따라, 그는 수년간 성당에서 성가대 활동을 하였습니다. 성당의 프레스코화, 조각, 건축 장식 등은 유년시절 그의 예술적 기질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1878년 정규 미술 교육을 받기 위해 프라하 아카데미에 지원했지만 아카데미는 그가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했습니다. 미술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던 무하는 1880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무대미술 회사에 수습 화가로 취직하게 됩니다. 당시 미술과 음악의 중심지였던 비엔나에서 그는 아름다운 건축물과 뛰어난 미술, 훌륭한 음악 등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일 년 뒤인 1881년 회사의 큰 고객이었던 링 극장의 화재로 직장을 잃게 된 그는 가진돈을 모두 털어 멀리 가보기로 결심했으며, 북쪽 행 열차를 타고 모라비아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생계를 이어가던 그는 곧 그를 눈여겨본 한 백작의 후원으로 뮌헨과 파리에서 정규 미술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1889년 갑작스럽게 백작의 후원이 끊기자 무하는 파리에서 책과 잡지의 삽화를 그리며 생계를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그의 그림은 꽤 인정받았으며 1895년 그린 연극 ‘지스몬다’의 포스터는 그의 삶에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됩니다. 당시 최고의 여배우인 ‘사라 베르나르’가 출연하는 이 연극의 포스터는 파리 전역에 배포되었으며, 대중은 아름다운 그의 그림에 매료당했습니다. 이후 무하는 6년간 ‘사라 베르나르’의 전속 디자이너로 활동하였습니다. 또한 그의 그림을 찾는 이들이 많아지며 상업 포스터, 잡지 일러스트, 달력 삽화 등 다양한 작업을 하게 됩니다.  

 

Gismonda 1895
Moët & Chandon Crémant Impérial 1899

1900년 오스트리아 정부는 그에게 파리 만국 박람회 참여를 위한 작품 의뢰를 하게 됩니다. 그는 작업에 착수하며 지배 지인 오스트리아를 위해 일하는 본인의 처지와, 식민지 지배에 고통받고 있는 자신의 민족들을 생각하며 수심에 빠졌습니다. 이 고민을 통해 훗날 무하는 애국심과 민족의 역사를 담은 20개의 연작 '슬라브 서사시'를 그리게 됩니다.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크게 성공 후, 무하는 활동 무대를 미국으로 넓히게 되었습니다. 본인이 계획하는 프로젝트인 '슬라브 서사시'의 후원을 위한 여행이기도 했습니다. 1906년에는 '마루슈카 히틸로바'라는 여인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딸과 아들을 얻었습니다. 미국의 사업가 찰스 리처드 크레인이 후원을 약속하며 '슬라브 서사시'의 작업에 착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10년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1000년이 넘는 슬라브족의 역사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1914년 오스트리아와 슬라브 민족인 세르비아의 전쟁으로 시작된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18년 드디어 체코는 독립을 하게 되었습니다. 

크게 기뻤던 무하는 정부에 무상으로 재능기부를 하였고 화폐와 우표, 국가의 휘장 등을 디자인하였습니다. 

무하가 디자인한 체코슬로바키아의 화폐

1912년부터 제작하기 시작한 '슬라브 서사시'는 1928년 20점의 대작으로 완성되었고 무하는 이 작품을 프라하시에 기증하였습니다. 

 

The Slav Epic cycle No.20: The Apotheosis of the Slavs, Slavs for Humanity 1926

 

민족이 통일하고 독립하는 염원이 이루어지자 그의 관심은 민족을 넘어 인류애로 향하였습니다. 이성과 지혜 사랑의 시대 3부작 제작에 착수했지만 1939년 3월 15일 나치의 침공으로 그는 작업을 마치지 못하게 됩니다. 

민족주의자이자 애국자인 알폰스 무하는, 나치의 눈에는 본보기로 잡아들여야 할 1순위였습니다. 노령의 나이에 체포와 구금 고문을 당한 그는 쇠약해졌고 1939년 7월 14일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나치는 대중들이 무하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엄포를 놨지만 그의 장례식에는 어마어마한 수의 체코 국민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어느새 국민화가가 된  알폰스 무하는 체코 국민들의 슬픈 작별인사와 함께 영면에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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