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프랑수아 밀레는 1814년 프랑스의 작은 농촌마을인 그레빌에서 태어났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기에 밀레는 어려서부터 농민의 삶을 가까이서 보고 자랐습니다. 장남인 밀레는 종종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와주기도 했지만 농사보다는 그림에 훨씬 더 재능을 보이던 소년이었습니다.
밀레가 18세가 되자 아버지는 밀레의 미래를 위해 그를 쉘부르로 보냅니다. 1833년부터 1836년까지 쉘브루에서 그림 공부를 하던 그는 1837년 장학금을 받으며 파리의 에꼴 드 보자르에 입학하였습니다. 1839년 살롱에서 떨어진 후 에꼴 드 보자르를 떠났으며 몇 차례의 도전 끝에 초상화 작품이 살롱에 당선되었습니다. 이후 밀레는 초상화 화가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가난을 면할 수 없었던 밀레는 초상화 외에도 풍속화와 누드화를 그리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갑니다.
1841년 폴린 비르지니 오노라는 연인과 결혼해서 함께 곤궁한 생활을 버텨나갔지만 첫 부인인 폴린 비르지니 오노는 결혼 3년 만인 1844년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실의에 빠져 쉘브르로 다시 돌아온 밀레는 일 년 뒤인 1845년 카페 종업원인 카트린 르메르라는 여인과 두번째 결혼을 하였고 이후 9명의 자녀를 낳는 대가족을 이루게 됩니다.
1849년 밀레는 바르비종으로 이사하였습니다. 당시 바르비종에는 유행병인 콜레라를 피해 이주한 예술가들이 모여 살고 있었으며 이곳에서 밀레는 테오도르 루소, 나르시스 디아즈, 트루아용 등과 친구가 됩니다. 이곳에서 주로 풍경을 즐겨 그리던 친구들과는 다르게 밀레는 인물에 관심을 두었으며, 특히나 고된 노동을 하는 농부들의 삶을 즐겨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밀레와 테오도르 루소의 우정에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밀레가 가난했던 무명 시전 친구인 루소가 반가운 소식을 들고 밀레의 집으로 찾아옵니다. 밀레의 그림을 감동 깊게 본 한 수집상이 밀레의 그림을 사고 싶어 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루소가 건넨 봉투에는 300프랑이 들어있었고 신이 난 밀레는 그림을 골라가라고 합니다. 몇 년 뒤 명성을 얻은 밀레는 루소의 집을 방문해서 벽에 걸려있는 자신의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힘들어하는 밀레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친구의 자존심이 다칠까 우려했던 루소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 그를 응원해 주었습니다.
1853 살롱에 출품한 '추수 중의 휴식' 이 2등상을 타게 되며 서서히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일하는 농부들을 경건한 영웅처럼 그리는 밀레의 그림에 프랑스의 보수주의자들은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프랑스혁명 이후 안정되어야 할 사회 분위기를 다시 선동한다는 이유였지요. 하지만 그의 작품에 사회주의자들과 대중, 수집가들은 열광하며 밀레는 곤궁했던 시절을 뒤로하고 화가로서 재물과 명성을 얻습니다.
1867년 만국박람회에서 회고전을 열고,이듬해인 1868년에는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말년까지도 꾸준히 노동자들의 모습을 그려나간 그는 1875년 1월 20일 가난한 시절 얻은 결핵이 원인이 되어 바르비종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그는 먼저 세상을 떠난 그의 절친한 친구 루소 옆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그의 작품에서는 진정한 노동의 의미와, 값지게 흘리는 땀의 경건함이 느껴집니다. 그와 동시대에 살던 누군가는 불온하다 생각했을 그의 작품에는 인간에게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게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는 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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