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화가는 작품 '절규'로 유명한 노르웨이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입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로 가득합니다. 그는 평생을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자라면서 겪어온 가족들의 죽음이 그에게 큰 상실감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에드바르 뭉크는 1863년 노르웨이의 뢰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군의관이었으며 한 명의 누나와 세명의 여동생, 한 명의 남동생이 있었습니다. 누나인 소피아와 에드바르 뭉크는 어머니의 예술적 감각을 물려받아 어렸을 때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습니다. 1868년 뭉크가 다섯 살이던 해에 그의 어머니는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9년 뒤인 1877년 뭉크가 의지하던 누나 소피아 역시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큰 비극을 두 번이나 맞닥트린 그의 가족들은 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크리스천인 그의 아버지는 신앙의 힘으로 슬픔을 극복하려 애썼으며 그것은 점점 병적으로 종교에 집착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이들이 실수할 때마다 '천국에 있는 어머니가 항상 너희를 지켜보고 있으며, 너희들의 행동에 크게 슬퍼한다.' 라며 자식들을 나무랐습니다.
뭉크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허약해 잔병치례를 많이 했습니다. 두 번이나 겪은 가족의 죽음, 억압적이고 공포스러운 종교적 압박, 허약한 몸 이런 힘든 상황들로 인해 뭉크는 점점 우울함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뭉크는 죽음이 점차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여동생 중 한 명은 어린 나이에 우울증으로 인한 정신착란을 겪게 됩니다.
1879년 아버지의 뜻에 따라 뭉크는 기술대학에 입학해 엔지니어가 되려 합니다. 하지만 잦은 병치레로 학업을 지속하기 힘들어지자 학교를 그만두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1881년 왕립 미술 공예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노르웨이의 자연주의 화가인 '크리스티안 크로그'에게 그림을 배웠으며 극단적 자유주의자인 '한스 예거'가 이끄는 '크리스티아니아 보헤미아’에 합류해 예거에게서 큰 영감을 받았습니다.
1883년 산업 미술전에서의 전시를 시작으로 뭉크의 화가로서의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젊은 작가들을 후원해오던 화가 프리츠 탈로는 뭉크를 눈여겨보고 그가 3주간 파리에서 머물도록 후원해 주었습니다. 1885년 파리로 가게 된 그는 빈센트 반 고흐,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 폴 고갱의 작품들을 접하게 되며 인상주의에서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프리츠 탈로의 형수인 밀리 탈로를 사랑하게 되었지만 그녀는 뭉크가 감당할 수 없는 자유분방한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에게 사랑의 상처를 입은 그는 여성 혐오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1889년 그는 26세에 크리스티아니아에서 개인전을 열어 110점에 달하는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같은 해에 국비 장학금을 받고 파리로 유학을 가 에콜 데 보자르에서 레옹 보나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뭉크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었으며 아버지의 사망으로 우울증에 시달리며 자살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1892년에 뭉크는 독일 베를린 미술협회의 초청으로 개인전을 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충격적일 만큼 암울한 그의 그림에 베를린의 보수파들은 반발했고 1주일 만에 전시회는 중단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일명 '뭉크 스캔들'이라 불렸는데 뭉크는 오히려 이 사건으로 유명세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독일 미술계에도 분열이 일어나 훗 날 베를린 분리파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893년부터 '생의 프리즈'라는 주제로 연작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들을 통해 그는 그의 인생을 돌아보며 인간의 모든 감정을 작품에 담으려 하였습니다.
4년을 독일에서 머물다 노르웨이로 돌아온 그는 1899년 '툴라 라르센'이라는 여인을 만나 다시 사랑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기쁨도 잠시, 자꾸 결혼을 보채는 그녀가 점점 부담스러워졌습니다. 결국 뭉크는 그녀에게 결별을 선언하고 맙니다.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툴라 라르센은 꾀병으로 뭉크를 불러내어 권총으로 위협합니다. 결국 총알이 뭉크의 손가락을 관통하였고 이 사건으로 그의 여성 혐오는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던 뭉크는 1908년 결국 병원에 입원해 8개월간의 요양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병원 치료로 인해 상태가 호전된 그의 마음만큼이나 그의 작품도 전보다 밝은 색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1909년 오슬로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큰 성공을 이루며 자신의 고국에서도 인정받으며 화가로서의 성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후 작품을 팔아 번 돈으로 오슬로 근교에 큰 대지를 매입해 그곳에서 남은 생을 작품 활동을 이어가며 보냈습니다. 80인 1944년 자택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어린나이부터 정신적 충격을 겪고 오랫동안 우울증에 시달렸지만, 화폭에 여과없이 투영된 그의 감정들이 작품을 더욱 빛나게 해 주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그림을 그리며 그 또한 어느정도는 마음의 치유를 받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고통스럽고 힘들 때는 속으로 끙끙 앓기보다 밖으로 표현하는게 마음에는 훨씬 좋은 일이라고 합니다.
가끔은 말하기 힘든 내면의 목소리를 대신 표현해 주는 듯한 뭉크의 작품들을 보며 마음의 위로를 받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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