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말에서 19세기 중엽 유럽 전반에 거쳐 발달한 낭만주의는 엄격한 규칙을 중시하는 고전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했습니다. 정형적인 틀에서 벗어나 화가의 감성과 상상력이 발휘되었으며 역동적인 구도, 강렬한 색, 강렬한 붓터치 등이 특징입니다.

 

독일의 낭만주의 대표화가로 꼽히는 카스파르 프리드리히는 1774년 9월 5일 독일의 그라이프스발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양초와 비누 등을 만드는 수공업자였으며 엄격한 루터교의 교인이었습니다. 그의 유년시절은 상당히 비극적이었습니다.  그가 7세이던 1781년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다음 해에는 누이 역시 사망했습니다. 13세이던 1787년에는  물에 빠진 카스파르를 구하려던 남동생이 익사하였으며, 1791년에는 다른 누이가 티푸스로 사망하였습니다.

이런 비극들은 카스파르의 작품들에 큰 영향을 주어 그의 작품 대부분에 우울,고독, 종교적인 경건함이 스며들게 됩니다. 

 

1790년 당시 그라이프스발트의 대학교수였던 요한 고트프리트 크비스토르프에게 개인교습을 받으며 미술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크비스토르프에게 신학자인 루드비히 고트하르트 코제가르텐을 소개받았으며 그는 카스파르에게 "자연은 신의 계시다."라는 가르침을 주게 됩니다.

20세인 1794년 당시 명성이 자자한 덴마크 코펜하겐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슈투름 운트 드랑*운동에 영향을 받은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 로렌체와 엔스 유엘의 지도를 받습니다. 

 

*슈투름 운트 드랑-1770년부터 독일에서 일어난 문학 사상으로 합리적 계몽주의에 반발 해 감정의 해방, 자유 관념 그리고 자아의식 등을 강조했다. ‘슈투름 운트 드랑’의 명칭은 클링거의 희곡에서 유래되었다.

 

1798년 독일의 드레스덴에 정착한 그는 초기에는 에칭, 판화등을 주로 작업했으며 1800년대에 들어서는 주로 풍경화 작업을 합니다. 

1805년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주최한 바이마르 콩크루에서 수상하며 예술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Procession at dawn 1805

 1810년 베를린 아카데미에 출품한 두점의 작품 'Monk by the sea', 'The abbey in the oakwood'를 빌헬름 왕태자가 구매하며 그의 명성 또한 나날이 높아져 갑니다.

독일 민족주의자였던 그는 1813년에 프랑스가 독일을 침공하자 독일의 전통 경관을 모티브로, 자신의 정치성향을 드러내는 많은 작품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monk by the sea 1808~1810

 

Chalk Cliffs on Rügen 1818

 

Mondaufgang am Meer 1822

 

 

 

 

그는 1818년 크리스티안 캐롤라인 봄머와 결혼했으며 이후 세자녀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으며 작품에 종종 그의 아내, 이웃, 친구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많은 작품을 남기며 활발한 활동을 하던 그는 낭만주의의 인기가 시들해 지며 서서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게 됩니다. 1835년 뇌졸증을 일으키며 반신마비를 얻었고 더 이상 서서 작업하기가 불가능했습니다. 이후 그는 작은 수채화와 드로잉 등을 주로 했지만 작품은 거의 팔리지 않았습니다. 그와 그의 가족은 근근이 생계를 이어나가는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그의 나이 66세인 1840년 5월 7일 드레스덴에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의 사후 60여년이 지나 베를린에서 그의 작품이 전시되며 카스파르 프리드리히의 이름은 후대에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1930년대 나치가 집권하며 그의 작품을 자신들의 선전에 이용하는 바람에 2차 대전 이후 한동안 그의 작품은 기피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1970년대가 되어서야 독일 낭만주의 운동의 핵심적 화가라는 평판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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