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명품 화장품 브랜드 '시슬리', 이 브랜드의 이름이 인상파 화가 중 한 명인 알프레드 시슬레(Alfred Sisley)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 분들이 있을까요? 시슬리의 창립자인 위베르 도르나노 백작 부부가 무척 좋아하는 화가 알프레드 시슬레의 이름에서 브랜드 이름을 착안했으며, 발음하기 쉽도록 시슬리로 바꿨다고 합니다.

 

시슬레는 인상파의 시작에 있어 주요 멤버 중 한명이지만 상대적으로 모네나 르느아르에 비해 덜 알려진  이름이기도 합니다. 

영국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생의 대부분을 프랑스에서 살았기 때문에 프랑스 화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는 1839년 영국에서 프랑스로 이민 온 부유한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18세인 1857년 아버지는 시슬레가 사업을 배우길 원하며 영국으로 보냈지만 시슬레는 4년 만에 짐을 싸 돌아왔습니다. 그 후 샤를 클레르의 화실에 들어가 이곳에서 인상파의 창시자가 되는 오귀스트 르누아르, 클로드 모네, 프레데리크 바지유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주로 야외에서 풍경을 그리며 꾸준히 살롱에 출품했지만, 당시 살롱에서 풍경화는 가치가 크지 않았습니다. 살롱에서 번번이 낙선하면서 뚜렷한 벌이가 없었지만 아버지의 경제적 지원으로 다른 친구들보다는 형편이 좀 나은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으로 인해 아버지의 사업은 무너지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시슬레는 남은 생을 빈곤하게 살게 됩니다. 전쟁을 피해 잠시 런던으로 갔던 그는 풍경화가인 존 컨스터블과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의 작품에 영감을 받아 빛을 담은 풍경을 그리는데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St Martin Canal 1870

 

 

 

 

종종 모네를 찾아가 함께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친했던 만큼이나 비슷한 두사람의 화풍 때문에 시슬레의 작품은 사후에도 모네의 그림자에 가려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1874년 인상파의 첫 전시에 약 20점 정도의 작품을 발표하였으며 이후 꾸준히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림 한 장 팔리지 않는 독립 전시회에 회의를 느낀 그는 당시 친구들을 배신하는 길이라 할 수 있는 살롱전에 출품하였으나 결과는 낙선이었습니다. 시슬레는 집세가 싼 지역을 찾아 여러 번의 이사를 다녀야 했습니다. 

 

1876년 센강 유역의 마를리 항이 홍수로 범람하며 그로 인해 시민들은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하지만 시슬레에게 시시각각 빛을 달리하며 반짝거리는 물은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그는 이 홍수를 주제로 6점의 작품을 그렸습니다. 

Boat in the Flood at Port Marly 1876

1880년 모레 쉬르 루앙으로 이주한 그는 그곳의 아름다운 풍경들을 화폭에 담아냈습니다. 꾸준히 작품 활동을 했지만 그는 여전히 이름을 알리지 못했으며 가난에 시달렸습니다. 

프랑스 국적을 얻기위해 두 번이나 시민권을 신청했지만 거절당했으며, 결국 1899년 59세의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Church in Moret  1889

그의 작품은 화려하거나 눈에 띄진 않지만, 소박하면서도 평화롭습니다. 아버지의 사업실패 후 내내 가난에 시달리고, 이름 한번 알려지지 않았으면서도 어떻게 이렇게 평화로운 그림을 그렸는지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그의 작품 속엔  보는 사람의 마음을 고요하고 평온하게 만들어 주는 마력이 분명히 있습니다. 시슬레의 마음속엔 보통사람은 너무 평범해서 못보고 지나쳐 버리는 일상을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snow at louveciennes 1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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